정부 디지털화폐와 비트코인 (CBDC, 중앙은행, 채굴비용)
솔직히 저는 처음에 비트코인 공부를 시작할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비트코인보다 더 좋은 디지털 화폐를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 뉴스에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비트코인이 곧 대체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구조와 통화정책의 본질을 공부하면서, 정부가 비트코인과 같은 시스템을 만들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기술 부족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발행량을 고정하면 통화정책이 불가능합니다
비트코인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정해져 있고, 누구도 이를 바꿀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럼 정부도 똑같이 발행량을 고정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역할을 공부하면서 이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중앙은행(Central Bank)이란 한 나라의 통화 발행과 금융 시스템을 관리하는 최상위 은행을 뜻합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나 한국은행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통화정책을 통해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인데, 통화정책이란 쉽게 말해 돈의 양을 조절해서 경기를 조율하는 것입니다. 경기가 과열되면 돈을 거둬들이고, 불황이 오면 돈을 풀어서 경제를 살리는 방식이죠.
그런데 만약 정부가 비트코인처럼 발행량을 고정한 디지털 화폐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중앙은행은 더 이상 통화량을 조절할 수 없게 됩니다. 2021년 코로나 팬데믹 때를 떠올려보세요.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낮추고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해서 경제 붕괴를 막았습니다. 만약 그때 발행량이 고정되어 있었다면 이런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정부가 발행량을 고정한 화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경제 조절 능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국경 없는 디지털 화폐는 국제 통화 시스템을 무너뜨립니다
비트코인은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브라질에서 인도로 자유롭게 송금할 수 있죠. 제가 실제로 해외 송금을 해본 경험을 떠올려보면, 은행을 통하면 며칠이 걸리고 수수료도 비쌌는데 비트코인은 몇 분 안에 전송이 완료됩니다. 이런 편리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 연준이 달러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디지털 화폐를 만들고, 이것을 전 세계 누구나 자유롭게 송수신할 수 있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공부하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개발도상국이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나라의 국민들은 자국 화폐 대신 달러 디지털 화폐를 선택하려 할 것입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에서는 자국 화폐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아서 사람들이 달러를 선호합니다(출처: 국제통화기금).
이렇게 되면 해당 국가의 중앙은행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됩니다. 자국 통화를 관리할 수 없으니 독립적인 환율 정책이나 통화 정책을 펼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국제 통화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국경 없는 디지털 화폐를 만들면, 소수의 선진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업은행의 존재 이유가 사라집니다
제가 은행 시스템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유는 이자 때문이 아니라 편리함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온라인 뱅킹으로 언제든지 송금할 수 있고, 카드 결제도 쉽게 할 수 있으니까요. 호주 중앙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 상업은행 자산의 60%가 이렇게 당장 찾을 수 있는 예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행들은 이 돈을 그냥 보관하지 않고 장기 대출로 운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업은행의 신용 창출(Credit Creation) 기능입니다.
신용 창출이란 은행이 보유한 자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대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100억이 있어도 모든 사람이 동시에 돈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150억을 대출해주는 식이죠. 하지만 경제 위기가 오면 사람들이 동시에 예금을 찾으러 은행으로 달려가는 뱅크런(Bank Run)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때 중앙은행이 무제한 신용을 공급해서 상업은행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국민들에게 직접 디지털 화폐를 제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굳이 상업은행에 돈을 맡길 이유가 없어집니다. 중앙은행 앱으로 직접 송금하고 결제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상업은행은 자금을 확보할 방법이 사라지고, 대출 사업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실제로 미국의 전미은행협회(American Bankers Association)는 연준이 CBDC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로비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이 원래 상업은행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데, 오히려 상업은행을 위기로 몰아넣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비트코인 채굴 비용이 신뢰를 만듭니다
제가 비트코인을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은 바로 '비용이 드는 화폐'라는 점입니다. 비트코인은 채굴(Mining)이라는 과정을 통해 발행되는데, 채굴에는 막대한 전기 비용이 듭니다. 쉽게 말해 비트코인 1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트코인 1개 가격에 준하는 전기료를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전기료가 시세보다 낮다면 채굴자들이 더 많이 채굴하려 할 것이고, 반대라면 채굴을 중단할 것입니다. 결국 시장 원리에 의해 채굴 비용과 비트코인 가격이 수렴하게 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역사적으로 화폐가 신뢰를 얻으려면 비용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금화가 오랫동안 화폐로 사용된 이유는 금 자체가 귀하고, 정부라 해도 금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현대의 중앙은행은 어떨까요? 전 연준 의장 벤 버냉키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은 특수 종이와 잉크로 돈을 찍지 않습니다. 그냥 클릭 한 번이면 돈이 생산됩니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이죠.
정부가 만 원짜리를 발행하기 위해 만 원의 비용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다릅니다. 비트코인 옹호론자들이 비트코인을 '사운드 머니(Sound Money)', 즉 건전한 화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도 남들보다 싸게 비트코인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경제 주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비트코인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개념을 이해하고 나서야, 정부가 비트코인과 같은 시스템을 만들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CBDC 뉴스가 나올 때마다 비트코인이 대체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두 시스템은 철학 자체가 다릅니다. CBDC는 정부의 통화 정책 도구이고, 비트코인은 중립적인 화폐 시스템입니다. 물론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과연 장기적으로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 더 나은 블록체인 기술이 등장하면 어떻게 될지 등은 여전히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부가 비트코인 같은 걸 만들면 끝이다'라는 우려는 기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시스템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설계되었고, 공존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Q1nWXulhVo